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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의 사건파일

⚫한국 의문사 사건 1호 서울대학교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유럽간첩단 조작사건 중앙정보부 안경상 김치열 고문 투신자살

by 와우의 레이스 2023.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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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시즌2)에서는 장항준 감독의 아내 김은희 작가가 출연해 '대한민국 의문사 1호'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을 조명한다

 
 
 
 
 
 
 

이 사건은 1973년 10월 19일에 일어난 의문사 사건이다 장준하의 의문사와 더불어 박정희 정권 치하 유신 체제의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이다

최종길은 1931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1951년 서울법대에 입학해 1955년에 졸업했다. 1957년 서울법대 대학원 졸업 후 독일로 유학 가 1961년 쾰른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2년부터 서울법대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1964년에 전임강사가 되었다. 1967년부터 법과대학 학생과장을 거쳐 1972년 서울대 정교수가 되었다.

최종길 교수는 박정희 집권 동안 1969년 3선개헌 이후 1972년 유신체제 하에서 민주화운동을 하거나 민주화운동에 대해 공개적 지지를 보낸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료 교수들의 진술에 따르면 최 교수는 경찰이 대학생들을 강압적으로 연행하는 것을 반대했고, 교수회의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학생들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온건한 법대 교수의 조용한 발언도 박정희 정권은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것 같다. 중정은 공작 차원에서 최종길 교수에 대한 내사를 진행했다.

1973년 10월 최종길 교수의 동생 최종선은 중정 감찰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한 해 전인 1972년 그는 중정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1973년 10월 13일 오전 그는 중정 동료로부터 중정이 북한 공작원 이재원과 중학교 동창인 자신의 형 최종길 교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최종선은 곧 직속상관에게 형인 최종길 교수가 혹시 이 문제로 조사받게 된다면 비인격적인 대우가 없도록 노력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날 오후 3시경 최종선은 동료인 담당 수사관을 만나 같은 요청을 했다. 그 수사관은 "이미 실질적인 조사는 종결되어서 최종적인 기자회견 발표문을 쓰고 있으니 신경 안 써도 된다"며 최종선을 안심시켰다. 그날 저녁 그는 형인 최종길 교수를 만나 낮에 중정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혹시 중정에서 수사 협조 요청이 있으면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고 최선의 협조를 다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아무쪼록 교수회의 등에서 발언을 자제해줄 것도 조심스럽게 요청했다.

1973년 10월 16일 오후 1시 45분, 아우 최종선과 형 최종길 교수는 다방에서 만나 차를 한 잔씩 마시고, 중정 남산청사 정문에 도착해 담당과에 알렸다. 담당과의 직원이 나와 최종길 교수를 안내하기 위한 절차를 밟았다. "형님, 이 못난 동생의 직장을 이때 한번 봐주십시오"라고 동생은 말했고 형은 "허허! 말로만 듣던 남산에를 다 들어와 보게 되었구나"하고 환하게 웃으며 헤어졌다

 

그로부터 사흘 후인 19일 새벽, 최종길 교수는 중정 건물 앞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최종선은 중정으로부터 아침 7시까지 출근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아주 불길한 예감을 안고 출근한 그는 형이 그날 새벽 1시 30분경 7층 화장실 창문에서 투신자살했다고 통보받았다.

중정은 "최종길이 간첩 사실을 자백하고 조직을 보호할 목적으로 중정의 남산 분청사 7층 화장실에서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유럽 간첩단 조작 사건의 참고인으로 수사에 협조했고 유가족들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스승인 게르하르트 케겔 교수와 친구 제롬 코헨 교수등이 최종길 교수는 고문을 받고 살해된것이라고 주장하며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신경림 시인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을 받을때 중정 요원이 신경림 시인을 끌고 창가로 가서는 "야 이새끼야, 여기가 어딘지 알아? 여기가 최종길이가 떨어져 죽은데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아래 의문사위) 당시 조사관 김성수 기자의 기사에 따르면 당시 최 교수는 조사관들 앞에 런닝과 팬티만 입고 있었으며 중정요원 차철권, 변아무개 등이 최 교수를 심하게 고문했다고 의문사위에서 증언했다.

변아무개가 최종길을 몽둥이로 빠따를 때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변아무개는 최종길에게 '엎드려'! 하고 말하자 최종길이 책상인가 벽에 양손을 대고 엎드렸습니다. 이때 최종길의 옷을 완전히 벗기지는 않은 상태였습니다. 최종길을 엎드리게 만든 다음 변아무개가 몽둥이로 엉덩이를 3~4회 정도 때렸습니다.

그리고 (차철권은) '이 새끼 제대로 불지 못해'라며 욕을 하면서 몇 차례 발로 최종길을 걷어찼습니다. (최 교수를 때린 몽둥이는) 조사실 내에 있던 야전침대에서 뺀 몽둥이로 각진 형태이며 길이는 1m에 약간 못 미치고 두께는 약 3 내지 4cm입니다. (최 교수는 그때) 런닝과 팬티는 입고 있었습니다."

최종길의 비참한 신음소리와 차철권이 악을 쓰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습니다. 7층 조사실에서 차철권이 최종길을 고문하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아~악' 소리를 들었는데 최종길이 맞으면서 내는 소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몇 차례나 그런 소리가 계속되었는데 단지 엄살이 아니라 고통에 겨운 비참한 비명과 신음소리였습니다."

최종길이 소변기를 딛고 투신자살했다기에 자세히 확인을 해봤으나 소변기에 발자국은 분명 없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최종길은 고문을 당한 이후였고 부검 사진에서 나타나는 엉덩이 상처로 볼 때도 최종길이 소변기를 딛고 투신자살을 했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엉터리 주장입니다."

최종길 교수가 고문 조사를 받던 중 사망하자 중정은 즉각 사태수습에 나섰다. 중정 감찰과장 이아무개는 최종길의 동생 최종수에게 중정에서 보상금으로 3000만 원(당시 여의도 52평 아파트 두 채 값)을 주고 자녀들 교육도 중정에서 책임을 지며 최 교수가 간첩이라는 사실도 발표를 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장례는 가족장으로 하고 화장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중정의 요구에 대해 최종수는 보상금 제의를 거절하고 최종길을 억울하게 간첩으로 만들지 말 것, 자녀들의 교육에 지장이 없도록 할 것, 막내 동생 최종선을 계속해서 중정 감찰실에 근무하도록 할 것 등 3가지를 중정 측에 제의했다. 중정은 최종수의 3가지 제의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곧바로 최종길이 간첩이라고 언론을 통해 발표했다

2006년 대법원은 "국가권력이 나서서 서류를 조작하는 등의 방법으로 조직적으로 사실을 은폐하고 고문 피해자를 오히려 국가에 대한 범죄자로 만든 사건에서 국가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라고 판결하여 국가는 최교수의 유족에게 18억 6천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아들인 최광준 교수는 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중이다. 부자가 모두 민법학자로, 그는 어머니 백경자 여사의 유지에 따라 최종길 교수의 사망으로 받은 보상금을 전액 서울대학교에 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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