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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의 사건파일

⚫한국 최초로 영부인 사망 대통령 저격미수 영부인 육영수 여사 암살사건 박정희 저격미수 문세광 권총 조총련 재일교포 사형 배후 박종규 경호실장 음모론

by 와우의 레이스 2023.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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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피로 물든 국립극장 8.15 저격 사건의 미스테리를 전한다.

8일 방송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장도연, 장성규, 장항준 장트리오가 '초대받지 않은 손님 : 8.15 저격 사건'을 이야기한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최대 미스터리로 남은 '그날'의 총성은 전국에 생중계되었다.1974년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29주년 8.15 광복절 기념식 행사장, 모두가 대통령의 경축사에 귀를 기울이던 사이 '탁'하는 둔탁한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진다.

놀란 관객들이 두리번거렸지만 소음의 실체를 확인하지 못하던 그때, 갑자기 "탕 탕 탕" 의문의 남성이 누군가를 향해 총을 쏘며 달려 나왔고 순식간에 기념식장은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아수라장이 된다. 괴한이 노린 목표물은 박정희 대통령이었지만 총성이 멈추고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은 연단에 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와 객석의 여학생이었다.

그날 행사장은 대통령이 참석하는 자리인 만큼 사전에 비표와 차량 출입증을 받은 사람만 입장할 수 있었다. 게다가 국립극장 주변과 기념식장 내부엔 수많은 경찰과 경호원들이 물샐 틈 없는 경호를 펼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놀랍게도 그날 저격범은 차량 출입증도 비표도 없이 총까지 숨긴 채 어떠한 제지조차 받지 않고 행사장에 잠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날 밤, 현장 감식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고 대기 중이던 서울지방경찰청 감식반에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사건 발생 몇 시간 만에 검찰에서 이미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는 것이다. 다음날, 사건 현장검증에 나선 서울시경 감식계장은 사건 현장에 남아 있어야 할 총알이 모두 사라져 버린 더욱 믿기지 않는 상황을 접하게 된다. 도대체 누가, 사건의 가장 중요한 증거물을 가져간 것인지 장트리오가 그날의 이야기를 전한다

수사 결과, 저격범의 정체는 '요시이 유키오'라는 가짜 이름으로 위조여권을 만들어 한국에 들어온 것으로 밝혀진 재일교포 '문세광'이다. 그는 사형을 선고받은 후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묘한 말을 남겼는데, 재판 결과를 전혀 예상치 못한 듯 보였다. 23살 평범한 청년은 어떻게 전대미문의 테러범이 된 것인지 의문은 꼬리를 물고, 1년 전 발생한 '또 다른 사건'으로 이어진다. 충격적인 8.15 저격 사건의 트리거가 된, 또 다른 '그날'의 사건을 공개한다.

현장에 있던 관객만 1,600명. 전 국민이 생방송으로 지켜보았음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로 남은 8.15 저격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인물의 생생한 목격담, 수사자료 등 생동감을 더해줄 시청각 자료들과 함께 그날 그 현장으로 돌아간다.

이 사건이 기록된 영상은 대한민국 사상 최악의 방송사고이자, 일종의 역사적 자료가 되었다. 당시 북한의 지시를 받은 범인 문세광(조총련계 재일교포)이 박정희를 겨냥해 발사한 총탄으로 사람이 죽는 광경이 생중계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영부인 육영수와 당시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장봉화 양이 사건에 휘말려 사망하였다

사건의 범인 문세광은 일본 오사카 미나미구 소재의 코쯔(高津) 파출소에서 권총을 절취하였다. 1974년, 그는 지인 요시이 미키코(吉井美喜子)의 남편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의 이름으로 여권을 발급 받아 방한하였다.

문세광은 권총에 실탄을 장전하여 바지 허리춤에 숨기고 오전 8시 40분에 M-20 포드 승용차를 타고 출발했다. 그는 차안에서 운전기사에게 '국립극장에 도착하면 내려서 문을 열어주세요'라고 부탁하면서 1만원권을 주었다

당시 현관에는 대통령 경호원이 3명, 경찰관이 8명 근무중이었다. 하지만 문세광은 별다른 검사절차 없이 통과했다. 반듯하게 차려입고 당당하게 행동하는 그를 본 경호원들이 고위인사라고 생각하여 통과시켰던 것이다. 여기에는 그가 일본인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었던 점도 한 몫 했다. 당시 경호원들은 훗날 이루어진 조사에서 3.1절 행사 당시 외국인에 대한 경호를 너무 심하게 했다고 지적을 받았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대했다'고 밝혔다. 즉 외국인에 대한 검문이 느슨해진 틈을 적절히 노렸던 것이고, 여권 상 이름은 '요시이 유키오'였던 문세광은 매우 운이 좋았던 것.

문세광은 약 10분간 연설을 듣고 있었고, 이윽고 저격을 결심하고 허리춤의 권총을 배 밑으로 옮기려 했고 권총의 공이치기를 올려놨는데, 권총을 꺼내다가 격발이 되어 자기 자신을 쏴버린 것이다. 총탄은 문세광의 왼쪽 허벅지를 관통했다

문세광은 허벅지로 오발을 하자마자 놀라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1층 B석과 C석 사이의 통로로 나와 연단을 향하여 뛰어갔다. 통로쪽 자리엔 경찰관들이 앉아 있었으나 아무도 문세광을 제지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2번째 총소리가 울렸다. 총탄은 박정희가 연설중이던 연대를 맞췄다. 그제서야 많은 사람들이 문세광이 아래층 중앙 뒷줄에서 단상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목격했다.

C석 가운데 앉아 있던 광복회원 이옥희가 "저놈 잡아라!"하고 소리쳤고, 그제서야 "잡아!" 하는 소리가 장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장내가 웅성거리는 사이 문세광은 이미 단상 밑 시립 교향악단이 자리 잡은 곳 2미터 앞까지 달려나갔다. 여기서 경축사를 낭독하는 박정희까지의 거리는 불과 10여m였다. 그는 C석 맨 앞줄에서 권총 사격 자세를 취한 후 3발을 발사했다.

하지만 제3탄은 불발되었다. 제4탄은 박정희가 연대 뒤로 몸을 숨겨 보이지 않자 오른쪽에 있던 육영수를 향해 쐈다. 18.2m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육영수는 총탄에 머리를 관통당했다. 제5탄은 단상 위의 태극기를 맞췄다.

그 때 독립유공자 자리에 앉아 있던 서대문세무서 재산세계장 이대산이 문세광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연단 위에서 경호원들이 박정희의 연설대를 둘러쌌다. 그리고 다른 경호원들과 C석의 독립유공자들이 문세광을 덮쳐 제압했다. 그가 넘어지면서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이 튀어 시향 바이올리니스트 김영목의 왼뺨에 맞아 피부가 2cm 가량 찢어지는 찰과상을 입었다.

총성이 더 울렸고, 이에 합창단원인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 장봉화 양이 맞았다. 장봉화양을 맞춘 건 문세광이 쏜 것이 아니라 경호원이 거기에 대응사격을 하다가 발생한 유탄이라고 추정된다. 이 외에도 천장에도 총알 한 방이 박혔으며, 이 역시 누군가가 장 내의 소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쏜 것이라 추정된다고 한다.(출처 나무위키)

육영수는 사건 발생 9분 만에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오전 11시 경부터 신경외과 과장 심보성 교수의 집도로 오후 4시 20분까지 뇌 수술을 받았다. 근처 병원과 적십자 혈액원의 모든 AB형 혈액을 쏟아붓는 대 수술이었는데, 400mL 혈액 148병을 집어넣었다. 용량은 59,200cc, 이 정도면 몸속의 모든 혈액을 거의 10번은 갈아 치울 만큼 많은 양이다

육영수는 이날 오후 7시경에 숨졌다.

이 때 가장 빠르게 상황 판단을 한 사람이 당시 단상 위에 앉아 있었던 박종규 경호실장이다. 그가 박정희 쪽으로 뛰어오는 걸 보자마자 앞으로 뛰쳐나가 쏘려고 했다.

문제는 경호원의 최우선 임무는 요인의 경호이지 위험인물의 제압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박종규는 맞대응으로 총격전을 벌일 것이 아니라 연대로 나와 박정희부터 보호했어야 했다

문세광은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 한국인 2세로, 사건 당시 만22세였다.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났을 때, 문세광은 오사카 한국 총영사관에 인질극을 벌이고 폭발테러를 벌이자고 한청 중앙본부 부의장인 김군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허나 문세광이 보내는 주소를 착각하여, 한청본부로 보내려던 이 편지가 같은 건물을 쓰고 있던 재일본대한민국민단에 보내졌고, 민단은 깜짝 놀라 주일 한국대사관에 이 편지를 보내게 된다. 문세광이 보낸 편지는 최종적으로 중앙정보부가 입수하였고, 이때부터 중정은 문세광을 예의주시하게 된다.

1974년 5월 그는 북한의 대일 공작선이며 재일교포 북송선이기도 한 '만경봉호(萬景峰號)'에서 박정희를 저격하라는 지령을 받았다고 하지만, 문세광은 전혀 공작원 훈련을 받지 않고 조총련과도 관계가 미약한 재일교포 운동권에 불과했다. 장거리에서 표적을 맞힐 수 있는 권총사격을 포함한 특수공작훈련은 커녕 가벼운 고문에도 쉽게 술술 불 정도로 나약한 인물이었다

이후 문세광의 음모론 배후론 SBS의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소리 분석이나 각도분석 등으로 고의적이 아니고 우발적으로 경호원이 쏜 총알에 육영수가 사망했다는 주장을 내세워서 파문이 일기도 했기도 했고

1974년 12월 20일 오전 7시 30분 서울구치소의 사형집행장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사건의 여파로 경호책임자인 박종규 경호실장과 국립극장 행사 관리 책임자인 양택식 서울특별시장이 경질되었다. 후임으로는 각각 차지철, 구자춘이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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