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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범곤 순경 총기난사사건 마을 62명 사망사건전말 사진 시체 시신 고향 가족

by 와우의 레이스 2023.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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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3(꼬꼬무시즌3) 에서는 우범곤 순경총기난사 사건에 대해 집중 조명하는 가운데 해당 사건에 대해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우범곤 순경 총기 난사사건'은 지난 1982년 우범곤 순경이 경상남도 의령군 궁류면 궁류지서(현 궁류치안센터)에서 근무하던 중 총기를 난사해 62명을 살해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이다 최단시간 최다살상 기록으로, 2011년 노르웨이의 아르네스 베링 브레이비크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기네스북에 오른 바 있다. 

 

고교 3학년때 아버지가 진급을 앞두고 대장암으로 병사하면서 가세가 기울자 우범곤은 성격 자체가 비뚤어지기 시작했고 해병대에서 군복무를 이후 제대 후 경찰관이 되었으며 초임지는 부산직할시 남부경찰서 감만3파출소였다. 이후 서울특별시 101경비단에 선발되어 청와대 경호에 근무했으나 중도에 전출당하여 경상남도 의령군의 궁류 지서로 좌천되었다

 

부산에서 근무할 당시부터 피의자들을 함부로 다루거나 윽박지르는 등 포악한 성격을 드러냈다고 하며, 당시 동료 순경에 따르면 평소 유순하다가도 술만 마시면 성격이 난폭해져 꼭 무슨 사고를 낼 사람 같았다고 한다. 청와대 경호에서 제외된 것도 성격이 너무 거칠어 근무 부적격자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범곤은 이웃집에 살던 전양과 사귀게 되었고 3월 9일에 전양의 집에서 동거 생활을 한다. 동거에 들어가기 전에 전양의 부모는 결혼한 뒤 함께 살라며 만류했지만 우범곤이 결혼 비용이 없다며 가을로 식을 미루기로 하고 당장 혼인신고부터 하겠다고 하였고 여자 집에 얹혀살게 되면서 자신의 무능함에 심각한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다

1982년 4월 26일, 그날 우범곤은 저녁시간 근무를 위해 낮 12시경에 집으로 들어와 점심을 먹고는 낮잠을 잤다. 그가 잠든 와중에 동거녀가 그의 몸에 붙은 파리를 잡기 위해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쳤고, 그 둘은 이를 계기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화를 미처 식히지 못한 채 우범곤은 오후 4시경 지서로 간 뒤, 저녁 7시 반경에 술에 취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만취한 상태에서 코피가 날 정도로 동거녀를 주먹으로 폭행했고, 같은 집에서 살고 있던 동거녀의 친척 언니가 뛰어 들어와 말리자 친척 언니의 뺨마저 닥치는 대로 때리며 난폭하게 변했다

지서로 향해 지서에 배속된 육군 방위병들과 소주를 퍼마시던 우범곤은 동거녀의 남동생이 와서 경찰이면 다냐고 소리를 질러대자 카빈소총을 장전했고 만류하는 방위병들을 총을 쏴 내쫓은 다음에 예비군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M1 카빈 2자루, 실탄 180발, 수류탄 7개 등을 탈취했다.

이후 마지막 평촌리 마을에 다시 나타나 알고 지내던 주민의 민가에 침입했다. 그는 일가족 5명을 깨운 뒤 갖고 있던 수류탄 2발을 한꺼번에 터뜨렸고, 그 자리에서 우범곤 본인을 포함해 4명이 폭사했다.

당시 관할 책임자인 의령경찰서장 최재윤 경정(1982년 당시 57세)은 다음날 부산에서 서장회의가 있다는 핑계로 하루 일찍 부산으로 이동하여 근무지를 보고 없이 무단이탈한 상태였다. 보고를 받고 복귀하여 범행 지역에 이르는 다리에 도착한 것은 익일 새벽 1시 20분이나 되어서였다. 현장에 도착한 의령서장은 경찰들을 규합하여 범인 수색에 나서기는커녕, 곳곳의 사상자를 목격하고 두려움에 빠져 곧바로 궁류지서로 도망쳤다.

새벽 2시에는 주민 2명이 목숨을 걸고 산을 넘어와 출동을 재촉하였으나 서장은 날이 어둡다며 이것도 거부하였다. 새벽 4시가 다 되어서야 마산시·진주시의 기동대가 궁류에 도착하였으나 결국 사건은 우범곤의 자폭으로 종료되었으니 요약하면 경찰력의 개입이나 저지없이 주민 살상이 진행되었고 속수무책으로 종료됐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무려 62명의 주민들이 사망했고, 33명의 부상자도 발생했다. 6명의 희생자는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다가 총상이 악화되어서 사망했다 반상회를 하느라 마을 주민들이 곳곳에 모여 있었고 밤늦게까지 불을 켠 집이 많아 피해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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