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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의 사건파일

⚫정부가 나서서 사람들을 감금했던 이유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위치 피해자 원장 일가 살해 성폭행 임신 올림픽

by 와우의 레이스 2023.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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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3 (꼬꼬무3) 1987 연쇄실종사건 부제 인간청소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아 수용시설 위치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일어난 인권 유린 사건 살해 또는 고문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피해자 수만 513명이다. 시체는 암매장 또는 근처 의과대학에 해부용으로 돈을 받고 몰래 팔았기 때문에 정확히 몇 명이 죽었는지 확인도 불가능한 이사건을 조명한디ㅡ

정규 편성으로 돌아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가 첫 방송부터 분노를 유발하는 사건을 다룬다. SBS 교양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꼬꼬무)가 이번 주 첫 방송을 앞두고 있다. 지금껏 장소를 옮겨가며 촬영하던 '꼬꼬무'는 정규 편성을 기념해 새롭게 변신했다. 다양한 매력을 가진 '꼬꼬무'만의 세트장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영화감독 장항준 대신 배우 장현성이 새 이야기꾼으로 합류해 뛰어난 연기력과 풍부한 감수성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장도연, 장성규, 장현성은 이야기 친구 게스트 이석훈, 전소미, 장항준에게 정체 불명의 남자들에 의에 의문의 공간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가차없이 매질을 당하고, 감금 당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던 장항준은 "거기가 지옥이지"라며 참담한 심경을 전했다. 특히 예고편 영상 말미 "살아서는 이곳을 못 나가겠구나"라고 전하는 장성규의 말과 '1987, 인간청소'란 부제목은 예비 시청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한편 3개월여 만에 정규 편성으로 새 단장해 돌아오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는 21일 오후 10시 30분 첫 방송된다.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군사정권 붕괴 이후로도 1987년 말까지 수용자 학대가 자행되었다. 전근대 시대에도 보기 힘들었던 인권 유린이 1980년대에 일어난 잔혹한 사건이다. 특히 이 시기는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 개최를 이유로 부랑자 단속이 극심했었고

수천 명의 원생 중 70%가 지나가던 일반인이었으며 부산 형제복지원 직원들에 의해 납치, 구금되었다. 당시 이 납치 사건에 부산시청과 부산 경찰이 적극 협조하였기 때문에, 원생들은 탈출해도 공권력에 의해 다시 잡혀들어갔다. 원장 및 관리자급 직원 4명이 체포되어 특수감금죄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윗선(전두환)의 지시에 의해 살인죄로는 기소되지도 않았다. 또한 반정부 시위로 번질 것을 두려워한 전두환의 지시로 2년만에 석방되었고, 원장은 2011년 사임을 전후하여 치매를 앓았다고 한다.

형제복지원은 육군 부사관이던 박인근이 1962년에 장인으로부터 인수한 감만동 형제육아원(1960년 개원)을 모태로 한 개신교계 부랑인 부랑아 보호시설로  인수 후 용당동으로 이전했다

1975년 이후 12년 동안 국고 횡령, 아동 강제 노동 등의 천인공노할 범죄 행위를 자행해오다 1987년 3월 22일, 시설 직원들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지고, 35명이 집단 탈출하면서 그 실체가 세상에 알려졌다. 부랑아 선도를 명목으로 길거리나 역에서 노숙자, 행려병자들, 고아들은 물론 심지어 멀쩡한 사람들까지 남녀노소 통금시간 이후에 돌아다니는 사람이란 다 잡아들여서 무차별적으로 끌고 가서 불법적으로 감금 및 강제 노역을 시켰고 원생들을 중대나 소대별로 나누어 관리하고 원장-부원장-총무-중대장-소대장-조장-조원 순으로 수직적으로 통제하는 군대식 구조를 지녔다. 시설 측은 탈출을 막기 위해 경비원 13명과 경비견 13마리를 풀어 24시간 감시했으며 축사 주위에 철조망 및 초소 2개도 설치했다.

시설 측은 미성년자 유인 약취, 혹은 납치, 또는 폭행 납치 등 갖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모은 후에 저항할 수 없게 하기 위해 다시 폭행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저항을 꺾을 수 없으면 살해, 유기하였고, 순종적으로 만들어 일을 시키는 도중에도 갖가지 이유를 만들어 매일 구타를 가했다

젊거나 나이 어린 여성, 그리고 일부 남성[3]의 경우에는 구타 이외에도 성폭행이 더해졌으며 거의 모든 피해자들에게는 제대로 된 식사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복지원 내부에 식료품 공장도 있었으나 거의 모두 외부로 판매되었고, 국가보조금에 더해 작업수당까지 모두 갈취되어 원장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으며 신민당 실태조사단 1차 보고서에 따르면 일반 수용자들은 1일 3~5백원, 장애인들은 2백원, 요양원 입원자는 3일에 버스 토큰 1개씩이었다

이런 일이 무려 12년 동안 지속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원생수만 513명에 이르렀다. 여기다 일부 원생들의 시신은 인근 의과대학에 해부실습용으로 3백~5백만에 팔려나갔다 그것이알고싶다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등 각종매체 피해자 인터뷰를 보면 곡괭이 자루로 머리를 하도 맞아 지금도 귀에서 물이 나오고 귓가에선 환청이 들릴 정도다. 머리는 맞고 터지기를 반복한 탓에 군데군데 음푹 패여 있다. 추운 겨울에도 기합과 구타가 끊이질 않았다. 그때 걸린 동상으로 인해 지금도 발톱 몇 개는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정씨는 형제원 내 성폭행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나금연이라는 이름의 소대장으로부터 수 차례 성폭행을 당했고, 그로 인해 신체적 후유증을 겪고 있다. 당시 형제원 내에서는 정씨 외에 다른 성폭행 피해자들도 여럿이다

보상또한 현재 인권유린을 저지른 부산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에 대한 1989년 대법원의 무죄 판결은 파기돼야 한다는 검찰의 비상상고를 대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대법원은 법리적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국가 차원의 진상 규명과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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