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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의 사건파일

⚫이웅평 대위 전투기(비행기) 귀순사건 미그기 보상금 근황 사망 가족 아들

by 와우의 레이스 2022.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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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건파일에서는 50여 년 전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으며 정체불명의 전투기와 함께 탈북한 '북한 공군 이웅평 대위 귀순 사건입니다

 

6.25 전쟁 이후 처음으로 공습경보를 울린 대한민국 1983년 2월 25일 당시 군은 대한민국 영공에 침범한 북한 전투기 MIG-19가 대한민국 영공으로 접근하자 북한의 선제공격이라고 판단했고 상황은 급박하게 흘렀습니다, 휴가 나간 모든 부대원에게 복귀 명령을 내리고 전투기 4대를 요격을 위해 출동시켰습니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전투기를 비행해서 남쪽으로 온 이웅평은 전투기의 날개를 흔들어 항복 및 귀순 의사를 밝혔고 이후 수원 비행장까지 에스코트를 받아 무사히 귀순에 성공했습니다

이웅평 대위가 귀순을 선택하게 된 이유

 

이웅평은 어느 날 함경북도 경흥군의 바닷가에서 이상한 비닐봉지를 줍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남한에서 유통되고 있는 삼양라면 봉지로, 당시 이웅평은 라면이 무엇인지 몰랐고, 국수라고 생각하면서 포장지에 적힌 글을 읽어나갔는데, 봉지에 적혀 있던 글귀는 이웅평 상위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된다. "판매나 유통과정에서 변질, 훼손된 제품은 판매점이나 본사대리점에서 교환해 드립니다"라는 문구를 읽고 그는 "남조선은 이런 작은 물건 하나까지도 소비자 인민의 편의를 도모하는구나. 그렇다면 인민의 지상낙원이라던 우리 공화국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북한에서 계란이 워낙 귀하다 보니 라면에 흔히 들어가는 문구인 '기호에 따라 계란을 넣어 먹으면 더 맛있습니다.'라는 문구를 보고 충격받았다는 이야기도 같이 전해진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귀순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이 이야기는 이웅평 본인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사석에서 밝혔습니다  귀순 당시 안기부, 보안사 등에서 국민들에게 대대적으로 귀순에 대한 홍보의 일종으로 꾸며진 이야기입니다.


물론 가난한 북한의 처지에 회의감이 든 것 자체는 사실이었지만 라면 한 봉지 때문에 탈북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인민들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고위급 장교였던 비행군관으로 근무하였지만, 정작 그 자신은 퇴근 후 배급받은 석탄가루를 물에 개어서 자급자족하면서 난방을 해야 했다. 그나마 이것도 고급 인력이라 보급해 주는 것이지, 그 외의 부대나 주민들은 땔나무를 알아서 구해야만 했습니다

 

귀순의 시작

 

이웅평의 탈북 스토리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은 무조건 최소 2대, 보통은 4대 이상의 전투기가 비행을 하는 '편대 비행'을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이웅평이 귀순을 결심하고 실행한 그날따라 유독 2대의 비행기가 작전을 수행하게 됐고, 마침 후발대 비행기였던 이웅평은 선발대 비행기의 눈을 피해 몰래 경로를 이탈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북한의 지상 레이더에 걸리지 않기 위해 초저고도 비행을 했다고 알려져 놀라움을 주기도 했는데 당시 이웅평이 몰고 온 MIG-19는 레이더 장비가 없어 전파를 따라가거나 계기판 혹은 육안 비행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웅평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레이더를 피할 수 있는 높이 불과 50m 초저고도 비행을 유지, 오직 계기판에 의존해 내륙 비행을 시도했고. 계기판만 믿을 수는 없는 상황이기에. 무선 위치 추적기를 남한 주파수로 하나 잡았는데, 그게 KBS라고 알려졌습니다

 

이웅평의 뱅크기동에 아군 F-5가 미그기를 유도하여 공군 10 전투 비행단에 안전하게 착륙시켰고. 이웅평이 수원 비행장에 착륙하고 난 뒤에도 미그기를 둘러싼 국군 병사들이 총을 겨누고 있어서 섣불리 나오지 못하고 계속 대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국군 병사들은 이웅평이 돌발적으로 공격할까 봐 총을 겨누고 있었고, 반대로 이웅평은 칵핏에서 나오면 곧바로 총을 쏠까 봐 무서워서 나갈 수가 없었다고 알려졌었는데 물론, 국군 병사들도 악의를 갖고 총을 겨눈 것은 아니었고 무슨 돌발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탈북에 성공한 그가 우리나라 군인에게 경계 속 처음으로 건넨 말은 '나 할 말 많다. 나 (혹시나 따라왔을지 모르는 북한군에게) 총 맞지 않게 해 달라'였습니다

귀순 이후 남한에서의 시작

 

 

당시 남한에서는 공산 진영의 군수품을 가지고 올 경우 장비에 대한 보상을 하도록 한 법률이 있으며 이렇게 주는 돈을 보로금 합니다

 

이웅평은 우리나라 정부로부터 당시 역사상 가장 높은 보로금을 받았습니다  이웅평이 받은 금액은 당시 돈으로 15억 6천만 원인데 현재도 15억은 큰돈이지만 당시 가치로 알아보면 강남 대치동 은마 아파트 한 채가 2천만 원에서 4천만 원밖에 안 되었고 복권 1등 당첨 금액은 1억 5천만 원이었습니다 복권 1등에 10번 당첨되고 이자까지 넘치게 받은 정도를 이웅평은 지급받았습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보로금을 받을 수 있던 이유가 이웅평이 몰고 온 MIG-19 덕입니다. 사실 이웅평 대령이 받은 보로금 대부분은 정보비 명목입니다 당시 북한 전투 비행기 시스템, 전투 요법을 주한미군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수집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심지어 북한 시스템은 소련, 중국과도 유사하다. 이웅평이 MIG-19를 가져오며 공산국가의 모든 감청 시스템을 다 알게 된 것이기에 엄청난 가치를 가지는 셈이었습니다 

또한 이웅평은 북한 엘리트 출신으로 김책공군대학을 졸업했으며 조선인민군 공군 1 비행사단 책임 비행사였고. 1983년 상위(한국 계급으로 치면 대위) 시절 전투기를 몰고 탈북했습니다 이웅평이 실제로 받은 총보상금은 현재가치로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55억 5천만입니다

 
 

 

​이후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무려 130만 명이 운집한 귀순환영대회도 열렸고 이웅평은 북한군 상좌에서 대한민국 공군의 소령으로 특별임관되었고 그는 다음 해에 공군사관학교 교수의 딸과 결혼도 하는 등 남한 생활에 잘 적응하였습니다 하지만 북한 정부는 그의 부모와 누이들 등 가족들을 모두 정치범수용소에 수감하였고 같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모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부모와 아들은 완전 통제구역 누이들은 혁명화구역으로 보내졌으며 부모는 끝내 처형되었다고 알려졌습니다

이웅평은 공군에서 계속 근무하다가 1996년에 대령으로 진급했고 공군대학 정책연구위원 및 교관으로 활동하다가 2002년 5월 4일 간기능부전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간이 나빠진 이유는 귀순 이후 혹시 모를 테러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이 간을 망가뜨린 원인이라고 한다 사후 그의 유해는 2002년 5월 9일 대전 현충원  장병 2 묘역에 안장되었고, 그가 타고 온 MiG-19는 북한에 반환되지 않고 현재 전쟁기념관  야외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

 

 

 

이웅평 대령은 탈북자로서 8번째 대령 진급자이다. 사례를 살펴보면 

 

첫 번째는 1950년 4월에 lL-10을 타고 넘어온 이건순 공군 중위로 1974년에 공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2번째는 6.25 때 귀순한 정봉욱 중좌로 대한민국 육군 대령을 거쳐 장군으로 진급, 7 사단장과 3 사관학교장을 역임하고 육군 소장으로 전역했습니다 

 

3번째 4번째는 1955년에 야크-18 훈련기로 함께 탈북한 북한 공군 이운용 상위와 이인선 소위이다.

 

5번째는 1960년에 미그-15를 타고 귀순했던 정낙현 대령(귀순 당시 북한군 소위)

 

6번째는 1965년 보트를 타고 탈북하여 해군 정훈감을 지낸 이필은 해군 대령

 

7번째는 1970년에 미그-15를 타고 넘어온 박순국 공군 대령

 

8번째가 이웅평 대령

 

9번째가 1983년 5월 귀순한 신중철 육군 대령 신중철 대령은 전역 후 대한민국 사회에 적응을 어려워하다 중국에서 잠적.

 

마지막 대령 진급자가 1996년 귀순한 이철수 대령

 

 

 

 

 

 

 

 

 

이상으로 이웅평 대위의 귀순 스토리 역대 대한민국으로 귀순한 북한 군인들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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